작성일 : 18-11-02 23:47
[사목단상] ‘자기 소멸’(anéantissement)에 대한 묵상
 글쓴이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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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단상

내가 처음 프랑스에 와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듣게 되던 ’“(anéantissement)에 대한 묵상자아 실현”, “자신을 활짝 피우기” 라는 말이 나를 한동안 헷갈리게 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젊을 때만 해도 한국 여자의 미덕은 나서지 않는 것, 잘 참는 것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녀원에서도 늘 배웠던 것이 “자기 자신을 죽이기”였는데, 프랑스에 와 보니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한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복음을 사는 일이 우리 삶의 내용일진대, 이는 즉 사랑을 사는 일이고, 사랑이란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 즉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니, 한국에서 배웠던 대로 “나 자신이 죽어야”  프랑스에서 말하는 “자신을 활짝 피우는” 것이 된다는 것, 결국 한국에서 배운 것과  프랑스에서 듣는 말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나중에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거의 20년 전 일이 다시 생각난 것은, 요즘 창립자의 글을 번역하면서 그 비슷한 갈등을 다시 한 번 겪었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창립자의 편지를 번역하면서 “자기 소멸”, “자기 포기”, “자신을 지우기”, “자신을 잊기”, “자신에의 죽음” 등을 대하다가, 밤에 자기 전에 읽는 최신 신학이나 심리학 책에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매우 강조한 글을 읽게 되니, 이게 바로 시대에 따라 사고 방식이 다르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뭔가가 두루뭉수리로 마음에 걸려 있었다.

어느 날 식탁에서 “우리 창립자와 제가 읽는 책의 저자가 천국에서 만나 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거에요.”하며 말문을 떼었다. 그러자 같은 식탁에 앉았던 자매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한 자매가 “자기 사랑이 없이는 자기 소멸을 못한다.”고 말을 했을 때 식사가 끝나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기어이 해결하고 싶어, 며칠 후에 그 말을 한 수녀님을 찾아갔다. 그 수녀님은 바로 프랑스 수련장을 10년이상 하시고, 지난번 임기까지 관구장도 하셨던 엘리자벳 우쎄 수녀님이다. 현존하는 가장 박식한 창립자 연구자라고 볼 수 있는 분이다. 그 수녀님과의 대화를 여기 옮겨 본다: ( 말=말가리다, 엘=엘리자벳)

말 : “저번에 수녀님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 소멸을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좀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엘 : “자신을 사랑해야, 즉 자신이 서 있어야 그러한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줄 수가 있지, 자신을 부정하거나 형편없는 것으로 여기면 그런 자신을 어뗳게 내어 줄 수가 있겠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

말 : “자신을 보잘것없는 죄인으로 여기면서 어떻게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어요?”

엘 : “하느님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연결이 되지요. 창립자가 17살 때 한 피정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한 것이 평생 마음에 새겨져 있었어요. 자신은 그 아름다우신 분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인식도...“

말 :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벌레에 비유했잖아요?”

엘 :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없이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깊이 깨달았던 분이지요. 그러나 작음과 낮음을 그토록 강조했던 프란치스코가 항상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미했던 걸 보세요. 우리는 인간의 허무와 그 인간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의 위대함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해요. 성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기쁨의 삶을 살았는지 알지요? 하느님 안에 피어난 삶을...  그리고 예수님을 보셔요. 수난 때에도 얼마나 품위를 지니셨었는지!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없이는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지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이미지.”

말 :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인 자기,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자기를 존경하는 것이겠네요? 그렇다면 창립자가 왜 그토록 자기 소멸을 강조하셨을까요?”

엘 : “창립자가 사셨던 19세기가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주 ‘나쁜(?)’ 시대였지요. 창립자가 신학 공부를 하신 적이 없고, 그러나 직관력이 뛰어난 분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신학을 넘어서서 앞서 가신 면이 있어요. 그러나 그 시대 안에 살고 있는 이상 그 시대의 용어로 말할 수밖에 없잖아요. ‘자기 소멸’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요즘 많이 강조하는 필립비서 2장의 예수님의 자세,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분을 높이 올리셨고, 우리는 여기서 ‘내려옴-올라감, 죽음-부활’의 신비를 보게 되지요.“

말 :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스스로 생명을 바치셨는데, 창립자의 글을 보면 자        신을 죽이고 남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말아라‘하는 말씀, 즉 의무로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제가 읽는 책에서는 복음과 강요는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거든요.”

엘 : “ 창립자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아야 해요. 그분의 삶 전체에 비추어 그 말씀을 이해해야지, 어떤 말씀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곡해를 하게 돼요. (그래서 나는 때때로 창립자의 말씀을 이런 저런 데 인용하는 것을 썩 달갑지 않게 느낄 때가 있어요. )

창립자는 젊었을 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한 이래로 늘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갈망으로 사셨어요.  그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두려운 하느님의 이미지와 달랐지요. 자신을 다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뿐이라는 걸 일찍 깨달으셨고, 오직 그를 위해 살고 싶어하셨잖아요. 이러한 자신의 보물을 딸들에게도 주시고 싶으셨던 거지요.“     

이 대화 후에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니, 예수님, 성모님, 성 프란치스코, 마리 드 라 빠시옹... 모두 자신을 다 내어 주며(창립자가 말씀하신 ‘자기 소멸의 삶’을) 사셨지만, 그분들만큼 자신을 활짝 피운 분들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미사 때 신부님이 강론 중에, 마치 전날에 한 우리의 대화를 듣기라도 하신 듯이, 결론처럼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자기 포기를 위해서는 포기할 것이 있어야지요. 즉 우리가 정말 잘 살고 있을 때, 삶다운 삶을 살고 있을 때 바로 자신의 그러한 삶을, 그러한 존재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자기 소멸과 자기 실현(참된 의미에서의 자기 실현)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현실의 두 표현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자신을 내어 주는 일, 자신을 바치는 일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복음이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되는가 아니면 힘겨운 숙제나 강요처럼 느껴지는가가 정해지고, 이에 따라, 이 ‘자기 소멸’이라는 말이 밝은 빛을 띨 수도 있고 어두운 빛을 띨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로마 6,13)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저 단순히 나 자신이나 자매들의 삶을 보아도, 자신에게 몰두하여 자기 입장만 생각하며 뭐가 나에게 이로울까를 찾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흉한지, 그럴 때 얼마나 자신도 그 주위 사람도 행복하지 못한지 너무나 분명히 볼 수 있는데, 이토록 명백한 것을 지금까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은 이해하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몇 번이나 하셔도 이를 알아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쭈어 보기를 겁냈던 사도들처럼...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리니,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며 성령을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원진숙 말가리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