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 시기

a. 마리아의 전교자회(1877)


1877년 초,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속죄회 수도자(Marie Reparatrice)로서 12년간의 인도 선교생활을 마치고 로마에 있었다. 선교지에서의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속죄회를 떠나야 했던 20명 동료들이 수도생활을 계속할 허락을 얻기 위해서였다. 1월 6일, 비오 9세는 인도 코임바토르 대목구 소속으로 특별히 선교를 고유 목적으로 하는 마리아의 전교자회를 설립할 허락을 주었다.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알려진 신비를 기념하는 주님 공현대축일의 일이었다. 이렇게 마리아의 전교자회는 인도와 로마에서 동시에 태어났다.

b.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1885)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생브리유에 정착한(1877) 마리 드 라 빠시옹과 그 동료들은 근처 샤틀레(Les Chatelets)에 수련원을 열었다(1880). 초기부터 인도와 프랑스 사이에 파견과 교환이 활발한 이 새로운 선교수도회에 선교의 열망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후 속죄회 분리에 관련하여 창립자에게 밀어닥친 오해와 반대, 시련은 결과적으로 본회를 교회의 심장부, 로마에 자리잡게 하고(1882), 프란치스코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써(1885) 본회가 온 세상 선교를 향해 도약하는데 발판이 되어주었다. 1885년, 회헌 인준과 더불어 본회는 교황청 포교성성 소속 수도회가 되었다. 1890년 다시 5년의 재인준을 거쳐 회헌은 1896년 결정적으로 교회의 인가를 받으면서 작은형제회 총장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놓이게 되었다.

c. 선교적 확장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은 1896년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올 예수님의 나라를 더 확장하기 위하여 우주 끝까지 가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이때부터 8년간 46개 수녀원이 설립되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은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가장 다양한 곳, 가 닿기 어려운 지역 여기저기에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매년 설립해달라는 요구도 많아졌다. 여기에서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주님의 숨결”을 느꼈고, 이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느끼는 단 하나의 아쉬움은 “신앙의 밭고랑을 일구려는” 부르심에 모두 응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창립자의 생전에 이미 본회 2069명의 자매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와 튀니지, 스리랑카, 중국, 북미, 인도, 콩고, 모잠비크, 미얀마, 일본, 마다가스카르, 칠레 등 24개국, 86개 공동체에서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있었다.

d. 카리스마의 인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의 카리스마가 진정한 것임은 1900년 7월 9일 중국 타이위안에서 순교한 일곱 자매들
과, 중국에 파견되어 선교하다가 1905년 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은 한 단순하고 겸손한 선교사 아순타 팔로타의 삶으
로 드러났다. 순교자들은 1946년 교황 비오 12세가 시복하고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시성하였으며
아순타는 1954년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또한 교회는 2002년 10월 20일 전교주일에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
옹을 시복함으로써 그가 남긴 카리스마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공인하였다.

2) 역대 총장들- 일치의 고리들

마리 드 라 빠시옹이 생전에 그토록 강조했던 ‘일치’를 유지하는 역할은 이제 ‘일치의 고리’인 총장들에게로 넘어갔다. 2대 총장인 마리 드 라 레담시옹(Marie de la Rédemption, 프랑스)은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정신을 지속시키는 데 주력하면서 자신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살아있는 증거를 남겼다. 특히 여성들의 교육과 권익 향상, 교육과 의료 사업에 주력했다. 또한 선교지의 사제 양성을 돕는 ‘베드로 사도회’를 위임받아 안정시킨 후 교황청으로 이양하였다. 그의 재임기인 1905년에서 1917년 사이에 본회는 11개 나라에서 97개의 새로운 설립을 했고 970명을 선교지에 파견하였다.

3대 총장인 마리 마들렌 드 파찌(Marie Madeleine de Pazzi, 프랑스)는 1918년 4월 총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16년간 병상에서 기도하고 고통을 봉헌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를 본회의 ‘모세’라 일컫는다.

4대 총장인 마리 드 생 미쉘(Marie de St. Michel, 벨기에)은 이제 커다란 수도가족이 된 본회를 조직하고 활기를 불어넣는 데 힘을 기울였다. 총장 재임기인 1920년에서 1932년 사이 일치를 강화하고자 창립자의 전기와 저서를 출판하고, 조직을 체계화하였다. 본회의 관상적 차원을 강조하는 한편, 중국과 인도 등 선교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본방인들로 이루어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오블라트’(Oblates FMM)에 대한 교회의 인준을 얻어냈다. 이 시기 본회는 101개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1000명이 넘는 자매를 선교지에 파견하였다.

5대 총장인 마리 마르거리트 뒤 사크레 꾀르(Marie Margeurite du Sacre Coeur,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총회가 열릴 수 없었던 이유로 1932년부터 1960년까지, 28년 동안이나 총장직에 있었다. 그는 심오한 영적 힘으로 이 번성하는 수도회에 영적이고 선교적인 힘을 실어주면서 자매들의 양성에 힘을 쏟았다. 세상 곳곳에 현존해 있는 본회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이 혹독한 시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처음으로 열린 1950년 총회에는 55개국 6800명 자매들의 대표가 참석하고 있었다.

전쟁 후 세상의 빠른 변화에도 교회는 정체되어 있었고, 본회 역시 그러했다. 선교 수도회의 일치를 유지하는 장치이던 중앙집권적 행정양식은 오히려 내적 변화를 방해하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도 본회는 외형상의 발전을 계속했다. 1951년부터 1959년 사이 본회는 한국을 포함한 61개 수녀원을 설립하였고 자매들은 10,000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 있던 72개 수녀원을 서서히 폐쇄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유럽 자매들의 투옥과 추방, 그리고 중국 자매들의 완전한 고립 등, 1966년 문화혁명 때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베이징(Beijing) 수녀원을 통해 들려온 그들의 이야기는 가히 영웅적이었다.

3) 적응과 쇄신- 공의회 정신에 따라

1960년 총회에서 마리 드 생뜨 아녜스(Marie de Ste. Agnes, 프랑스)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지도 덕분에 본회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쇄신과 적응”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다.
1960년 총회 때 가대 수녀(Mère)와 평수녀(Soeur)로 구분하던 계층을 폐지하고, ‘오블라트’들을 본회 수도자들과 통합하였다. 총장과 총평의원이 규칙적으로 전 관구를 방문하여 우리 본연의 성소에 충실하도록 격려하기로 하였다.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으나 수도생활을 쇄신할 필요성에는 다 같이 공감하였다.
1966년 준총회는 차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특별총회로 인준 받은, 본회 쇄신의 시발점이 된 총회이다. 원천에 충실하면서 필요한 변화를 이루어내고자 초기 양성과 영속 양성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본회 정신에 관한 문서들을 출판했으며 본부와 관구 수준에서 전례, 본회 정신, 성소, 사목계획 등의 연구위원회를 두었다.
1972년 총회 준비의 일환으로 다시 모든 자매들을 대상으로 의견문의가 실시되었다. 총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 한편으로 본회 카리스마와 프란치스칸 정신에 대한 연구와 국제 세션이 조직되었다.

4) 새회헌의 작성과 전달

1972년 총회 참석자들은 다섯 달 동안 토의를 통해 FMM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다음 6년간의 방향을 선택하였으며 일치를 보존하는 한에서 다양성과 균형 잡힌 지방분권제를 채택하였다. 이때부터 6년간 본회는 회헌 없이 총회문서로만 생활하였다. 이때 알마 듀포(Alma Dufault, 미국)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총회에 온 5대륙 40개 국적 131명 총회 참석자들은 다섯 달에 걸쳐 회헌을 작성하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에 몰두하였다. 1979년 2월 마침내 만장일치로 승인된 새 회헌은, 그해 4월 10년 기한으로 인류복음화성의 인준을 받았고, 1985년에 결정적인 인준을 받았다. 이로써 본회는 일시적인 시험 단계를 벗어나 교회가 인준한 새로운 법적 문서를 가지게 되었다. 1982년 <프란치스칸 수도 3회 회칙과 삶>이 새로 작성됨으로써 법적 문서의 쇄신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5) 오늘날의 선교 사명

새 회헌으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회원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이 명확해지자, 이제 “오늘날 FMM에게 선교는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984년 총회는 "오늘날 FMM 선교, 가난한 이들의 호소와 현 사회의 도전에 대응하여 복음화하는 공동체로서 어떻게 예언적인 응답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 선택, 대화, 토착화와 양성을 선택하였다. 각 관구의 특수성이 강조되고 균형 잡힌 지방분권제가 실시되었다.
1990년 총회에서는 “성체성사에 중심을 둔 우리 FMM 선교 영성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라는 주제로, 급변하는 세상에 상응하는 새로운 선교 영성을 탐구하였다. 이 총회에서 FMM은 '누구에게' 갈 것인지 보다는 선교활동에 임하는 '태도와 존재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물었고, 총회는 그 답을 바로 '성체'에서 찾았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성의 갈등, 관상과 활동의 통합, 작음의 태도, 열린 마음으로 듣고 배우려는 자세, 우리 서원 생활의 질 등에 대해 솔직하게 질문하면서 '성체'야말로 우리 삶의 일치와 통합의 근원이며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친교를 건설하라고 우리를 파견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명확히 했다.
“보편적 선교, 생명과 희망에 봉사하는 친교 안에서의 모험”이라는 주제로 열린 1996년 총회에서는 FMM 선교 정체성을 재정의 하였다. 그것은 곧 평화의 조성자로서 정의를 생활하는 것, 문화 안에서 복음을 육화하는 것, 친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2002년 총회 주제는 “복음을 사는 여성들이여,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선물에 다시 불을 지피자!”였다. 복음을 생활하는 여성 제자로서의 신원을 재확인하고 “우리 신앙이 약화되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 철저하지 못했음을, 우리 생활에서 내면성과 균형이 부족하였음을, 그리고 본회에 대한 소속감이 약화되어 그것이 공동체 생활과 선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반성하였다. 현재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자매들은 “고통 받는 세상과 연대하면서 창조적인 충실성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살도록 부름 받은 프란치스칸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열렸던 2008년 총회 방향에 따라 겸손하신 하느님께 대한 관상을 강화하면서 “작음과 섬김을 사는 fmm 공동체로서 고통받는 세상과 연대”하려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