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Marie de la Passion)

엘렌 마리 필리핀 드 샤뽀땡 드 느빌(Helene Marie Philippine de Chappotin de Neuville), 훗날의 마리 드 라 빠시옹은 1839년 5월 21일 프랑스 낭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화목한 가정과 깊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행복을 누리던 어린 시절, 엘렌은 늘 “참으로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17세, 피정에 참석하고 있던 엘렌이 성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할 것이다.” 엘렌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분의 사랑에 합당한 응답은 오직 “수도생활로써 내 존재를 온전히 바치는 것” 뿐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지체된 이 갈망은 1860년 12월, 글라라회에 입회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후 성프란치스코의 가난과 단순은 엘렌에게 늘 소중한 것이 되었다.

1861년 1월 23일 낭트의 글라라 수녀원, 엘렌은 제대 앞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을 축성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느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제물인 마리아.”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엘렌은 이제 그분의 희생하시는 사랑으로 빠져든다. 훗날 이날을 자신이 새로 태어난 “생일”이라고 회상할 정도의, 중요한 영적 체험이었다. 이 엄청난 영적 체험으로 인하여 병이 난 엘렌은 자신의 집이라 여겼던 수녀원을 떠나야만 했다. 1864년 엘렌은 고백사제의 권유에 순종하여 ‘속죄회(Society of Marie Reparatrice)’에 입회하고, 마리 드 라 빠시옹이라는 수도명을 받는다. 그의 생애는 이 이름, ‘빠시옹(Passion)’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빠시옹’은 수난이란 뜻과 동시에 열정이란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받아들여야 했던 모든 어려움은 실상 그를 불태운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는 열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수련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인도 선교지에 파견되었으며, 곧 29세의 이 젊은 수도자는 속죄회 인도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된다.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이고 강하고 용기있는 이 여인은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견디고 선교사업을 확장할 힘과 지혜를 길어내었다. 그러나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과 어려운 본부와의 통신사정으로 인해 오해와 갈등이 생겼고, 결국 속죄회 인도 선교지 소속 수도자 20명은 속죄회를 떠나 서원생활을 계속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1877년 1월 6일,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신비가 공적으로 드러남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에 교황 비오9세는 마리아의 전교자회를 인준하였다. 당시 인도와 프랑스에 수녀원이 단지 세 개뿐이었을 때부터 “본회의 목적은 보편적이다.”라고 표명할 정도로 온 세상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나아가기를 원했던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원의와 잘 어울리는 날이었다. 1885년 프란치스코 수도3회에 가입함으로써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라 불리게 된 이들은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봉헌하는 제물자, 성체를 조배하면서 자신을 바칠 힘과 선교활동에 필요한 활력을 얻는 조배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일하는 전교자들이다.

보편적 선교에 봉헌된 첫 여성 수도회의 창립자가 된 마리 드 라 빠시옹은, 그는 세상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어두운 곳, 아픈 곳, 깨어진 곳, 그 모든 곳에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에 사로잡혀 외쳤다.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 진지와 애덕에 매혹되어 늘 그것을 추구했던 그는 진리와 애덕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딸들을 온 세상으로 파견하였다. 단순하고도 겸손한 자세로, 그러나 창립자의 불타운 열정을 나누어 가지고 마리아의 전교자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튀지지, 스리랑카, 중국, 북미, 인도, 콩고, 모잠비크, 미얀마, 일본, 마다가스카르, 칠레 등으로 떠났다. 온 세상을 끌어안는 마리 드 라 빠시옹의 보편적인 시선 덕분에 수도회는 모든 이를 한데 모으려는 예수님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에 고유한 방식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인도에서 여성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했던 그는 세계 어디서든 여성의 교육과 상황개선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와 사회의 필요에도 민감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답기를 기도했으며, 로마의 수녀원은 신앙을 쇄신하러 로마에 오는 순례객들에게 늘 열려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산업혁명 이후 새로 부상한 노동자 계층을 이해했으며, 그들을 위한 활동에 시간을 내었다. 그 시대의 문제를 일찍 깨달은 선각자나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은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서 지지와 격려, 충고를 얻을 수 있었으며. 수녀원의 객실은 자주 사회운동가들의 토론장으로 사용되었다.